綾城具氏 始祖 諱 存 裕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直長公 宗中

능성구씨의 연원과 유래

 

1. 능성구씨의 연원

 

연원이라는 말은 사물의 근원(根源)을 이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 생겨나게 된 시초나 기원을 뜻하는 용어이다. 어떠한 성씨의 연원을 고찰하려면, 그 성씨의 시조가 되는 분의 출신지, 생몰년대, 주요경력, 묘소의 위치 등에 대하여 탐색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능성구씨의 연원을 알기 위해서는 능성구씨의 시조인 ‘구존유’공의 출신지와 생몰년대, 주요활동내용과 묘소 등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여 탐색해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시대의 역사서나 능성구씨의 족보를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주요 성씨들의 득성(得姓) 연원을 살펴보면, 대개 네 가지 정도의 경우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시조의 탄생신화 → 밀양박씨(박혁거세), 제주고씨(고을나) 등

▶공신으로 사성(賜姓) → 청주한씨(한란), 평산신씨(신숭겸) 등

▶귀화에 따른 득성 → 연안이씨(이무), 신안주씨(주잠) 등

▶토착화한 성씨 → 전래되어온 성씨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등

 

능성구씨 시조의 경우에는 탄생신화가 없고, 국가에서 사성을 받은 기록도 없으며, 외국으로부터 귀화한 성씨도 아님을 감안해 볼 때, 토착화한 성씨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조(구존유 공)의 유래◈

 

능성구씨 족보 제1권의 제파지원(諸派之源)중 시조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高麗文魁 壁上三韓三重大匡 檢校上將軍

고려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 검교상장군을 지냈다.

▶墓和順郡春陽面天台山左風吹羅帶形云而失傳

묘소는 화순군 춘양면 천태산 좌측의 풍취나대형에 있었다고 하는데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는다.

▶配新安朱氏 父宋翰林學士潛 嘉定甲申與七學士 浮海而東來居錦城

被蒙古追索名積德 隱居綾城考亭里 高祖徽國文公晦菴先生熹

부인은 신안주씨이고, 아버지는 송나라의 한림학사인 잠이다. 1224년(고려 고종11)에 7학사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와 금성(나주)에 살았다. 몽고의 추색을 당하자 이름을 ‘적덕’으로 바꾸고 능성의 고정리에 숨어 살았다. 고조할아버지는 휘국문공 회암선생이신 주희(주자)이다.

 

능성구씨 족보에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 등 어느 사서에도 이와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신안주씨 족보에 구존유공이 신안주씨의 시조인 주잠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신안주씨 할머니와 혼인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능성구씨의 시조인 구존유 공의 생존연대는 1200년대로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구존유 공이 역임한 관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문과, 벽상삼한, 삼중대광, 검교상장군을 나누어 분석해보면,

 

▶고려문과 : 고려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이르는 용어임.

▶벽상삼한 : 벽상은 벽상공신, 삼한은 고대국가인 삼한(마한, 진한, 변 한)을 아우른 말로 고려를 뜻하는 것이며, 벽상삼한이란 표기는 고위직으로써 공신으로 책록 된 경우에 그 사람 이 역임한 관직명 앞에 붙이는 용어임.

▶삼중대광 : 고려시대 최고 벼슬인 정1품관의 품계이며, 중대광은 종1 품관의 품계임.

▶검교상장군 : 검교는 임시로 관직을 임명할 때에 그 관직명 앞에 붙 이는 용어이며, 상장군은 무반으로 최고의 직위이고, 검교는 실직이 아닌 산직벼슬로 당상관은 검교를 앞 에 붙이고, 동정은 당하관의 산직인데 관직 뒤에 붙인 다.

 

결론적으로 구존유 공은 고려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며, 검교상장군으로 공신에 책록되어, 정1품인 삼중대광의 품계를 받은 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사(正史)에서 그에 관한 기록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이 ‘시조동래설’이다. 시조동래설이란, 시조인 구존유 공이 장인인 주잠 선생을 따라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했다는 설이다. 당시에 대륙의 정세를 감안해 보면, 남송이 몽골족인 원나라에 의해서 망하게 되었으므로 주잠을 비롯한 7학사들이 고려로 망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이 고려로 망명하여 원나라의 추적을 피해 숨어살았다면 구존유 공이 어떻게 고려 조정에 나아가서 고관대작이 되었겠는가? 칠학사는 葉公濟(엽공제) 陣祖舜(진조순) 周世蹟(주세적) 劉應奎(유응규) 桂行秀(계행수) 趙昶(조창) 陶成河(도성하)이다.

 

오히려 그 당시 능주지역에 구씨들이 호족으로 세거하고 있었으며, 주잠의 일행이 그곳으로 숨어들어 살 때에, 그 지역의 호족인 구씨들의 배려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능주지역에 구씨들이 호족으로 세거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의제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즉 후삼국 말기에 태봉국의 궁예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로 ‘구진(具鎭)’이 있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주지역의 진무를 위하여 구진을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으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구진이 궁예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부임하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왕건의 참모들이 만약에 구진이 부임하지 않으려 한다면 차라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고 하므로, 구진이 마지못해서 부임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고려사> 세가편에 나오는데, 왕건이 굳이 궁예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구진을 나주에 보내려고 했다는 것은 구진이 나주지역의 호족으로서 신망이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시조의 동래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시조의 동래설은 <주청계공실기>라는 문헌에 나오는 내용으로, 조선 중후기 모화사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 없이 수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후백제때 具道 아들 具端舒, 궁예태봉국 具鎭 나주대행시중, 太祖때 具足達 벼슬 홍문경감이며 서도가로 충주정토사 법경대사 탑비(서기 920년경)에 글씨가 남아있고, 강릉지강원남원대사 탑비에 필적이 남아있다.

 

고려숙종6년(15대) 서기 1101년 탐라국(현 제주도) 성주배융부위인 具代가 유격장군에 임명되었던 사실은 고려사에 나오는데 이분들이 우리 시조보다 300년~200백여년전의 具氏인물인데 시조와 어떠한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이나 동남아 어느 나라에도 具氏성을 쓰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나라가 唯一하므로 우리는 土着姓氏임이 틀림없다.

 

구씨의 관향(본관)을 능성으로 정하게 된 이유는, 시조인 구존유 공의 출신지이며, 시조공과 2세인 구민첨 공의 묘소가 능성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관향을 정할 때에는 대부분 시조의 출신지를 관향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능성구씨라는 명칭을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여러 가지 사료를 분석한 결과, 능성구씨라는 명칭의 사용은 고려시대 말기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서를 보면 구예(4세), 구영검(5세), 구홍(7세) 등 모두 성명만을 쓰고 능성인이나 능성구씨로 쓴 경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구연(3세, 증 면성부원군), 구예(4세, 면성부원군), 구영검(5세, 면성군), 구위(6세, 문정공 증 면성부원군) 등을 보면 ‘면성구씨’로 착각할 정도로 면성이란 지명을 쓰고 있다. 이는 4세인 구예 공이 국가로부터 면성지역을 하사받아서 정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래 구예 공의 외가가 면천이었으므로 구예 공은 외가인 면천에서 출생하여 성장했다고 추정한다면, 그곳이 곧 구예 공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국가가 구예 공의 사패지를 면성으로 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 당시에 이미 능성구씨라는 관향을 공개적으로 사용했다면 앞에 열거한 3.4.5.6세조를 면성부원군이 아닌 ‘능성부원군’으로 봉군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와 기록들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는 ‘능성구씨’라는 관향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능성구씨가 사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세종 때에 편찬된 <고려사>에 보인다. 고려사의 <구영검 열전>에 ‘구영검은 능성인으로 면주에 살았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능성구씨의 관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구치관 공이 능성부원군에 봉군됨으로써 능성구씨로 정착하게 되었다.

2. 능성구씨 제파지원(2세~7세)

 

■ 2세 : 구민첨(고려 동평장사)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목의 사록참군겸장서기를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처 동평장사(정2품)에 이르렀다.

부인은 면천복씨로 봉정대부인 복윤량의 따님이니 고려의 개국공신인 무민공 복지겸의 후예이다.

묘소는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있으며, 묘표문은 백담 구봉령공이 지었고, 중건묘표문은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 공이 지었으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 3세 : 구 연(고려 안동면도감판관, 증 면성부원군)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면도감판관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문하좌정승 면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부인은 면천한씨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한자희의 따님이니 첨의중찬을 지낸 한강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있으며, 묘표문은 부제학 이종우 공이 지었고, 중건묘표문은 대제학을 지낸 박규수 공이 지었으며, 자녀는 7남 4녀를 두었다.

*묘소를 실전하였다가 후손들이 다시 찾았다.

◈4세 및 분파현황◈

4세 및 분파현황

4세

5세

6세

7세

분파

구의 (삼사소윤)

구 해

구서진

구현좌 (사재감판사)

판사파

구원개 (제학)

-

-

-

-

구백전 (장군)

구문형

-

-

-

구성연 (승려, 봉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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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이 (예문관대제학)

구인석

구 복

-

-

구천용 (직장)

구 식

구 록

구영랑 (문과 시랑)

시랑파

구 예 (판전의시사, 면성부원군)

구영검 (전리판서, 면성군)

구 위 (소부윤, 문정공)

구 홍 (좌정승)

좌정승파

구성량 (판안동대도호부사)

판안동파

구성로 (강원도도원수)

도원수파

구 흥 (판예의시사)

구현보 (좌우보위중랑장)

낭장파

구현기 (평택감무)

감무파

구 의 (공조전서)

구성미 (참 판)

참판파

구원립 (지문천군사)

문천군사파

 

■ 4세 : 구 예(중대광 판전의시사, 면성부원군)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중대광 판전의시사(종1품, 정승급)를 지내고 면성부원군에 봉군되어 면주땅을 하사받았다. 부인은 아주신씨로 도염서령을 지낸 신진승의 따님이고 문하시중을 지낸 아주군 신익휴의 증손녀이며, 공의 사후에 묘하에 신암사를 건립하여 공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을 세웠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있으며, 묘표문은 고봉 기대승 선생이 지었다.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으며, 능성구씨의 90% 이상이 이 분의 자손이다.

■ 5세 : 구영검(중대광 전리판서, 면성군)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중대광 전리판서를 지냈으며, 선충익찬공신으로 면성군에 봉군되었다.

부인은 죽산안씨로 정당문학을 지낸 안규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은 경주김씨로 흥녕부원군 김자장의 따님으로 도첨의중찬 계림부원군 김혼의 손녀이며, 2남 5녀를 두었다. 묘소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봉래리에 있으나, 북한지역이므로 당진의 4세조 묘하에 망제단을 세웠다.

*고려사에 구영검 열전이 들어있다.

 

■ 6세 : 구 위(중현대부 소부윤, 문정공)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소부윤(종3품)을 지냈으며, 장자인 문절공(좌정승)에 의하여 삼중대광문하좌정승에 증직되고 면성부원군에 봉군되어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부인은 경주박씨로 보문각태학사 문정공 박세태의 따님으로 월성대군 박언의의 후예이다.

묘소는 황해도 개풍군 남면 율로리에 있으나, 북한지역이므로 당진의 4세조 묘하에 망제단을 세웠으며, 자녀는 5남 9녀를 두었다.

 

■ 7세 : 앞의 ‘4세 및 분파현황’에 나왔다.

◆. 도원수파 충렬공계 직장공 자손

 

■ 7세 : 구성로(도원수파 파조, 문정공의 3남)

태조 이성계의 부장으로 조선왕조 개국시 원종공신이 되고, 강원,경상도부원수와 개성윤을 지냈으며, 판안동대도호부사를 거쳐 강원도도원수를 역임하여 자헌대부(정2품)가 되고, 손자인 충렬공에 의해 의정부좌찬성(종1품)을 증직 받아 숭반에 올랐다. 부인은 김해송씨로 밀직제학을 지낸 김천봉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에 있으며, 신도비명은 일중 김충현 공이 지었다. 자녀는 2남을 두었다.(앙:전서공,양:공주 목사)시사는 음력10월01일

*공의 묘소도 일정기간 실전되었으나 후손(빈공)이 찾았다.

 

■ 8세 : 구 양(공주목사, 도원수공의 2남)

공주목사를 지내고 아들인 충렬공에 의해 영의정에 증직되고 능안부원군으로 봉군되었다.

부인은 해평윤씨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윤사영의 따님으로 정당문학과 진현관대제학을 지낸 문영공 윤지현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에 있으며, 자녀는 4남 4녀를 두었다.

*여기서 충렬공, 도정공, 목사공, 호양공계로 분파되었다.

 

■ 9세 : 구치관(충열공)(영의정, 목사공의 장남)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중하위직을 두루 거쳐 전문행정관료가 되어,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와 좌우찬성,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변경에 나아가서는 평안도절제사, 함길도도체찰사, 진서대장군 등으로 국가의 중추가 되어 당시에 신숙주, 한명회와 더불어 ‘삼중신’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좌익공신과 좌리공신에 올라 능성부원군이 되고, ‘충렬’이란 시호를 받았다. 청백리상신으로 기록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능성구씨의 중흥조가 되었다.(능성구씨의 유일한 영의정 임)

부인은 청주이씨로 사직벼슬을 지낸 이중부의 따님으로 진현관대제학을 지내고 낭성군에 오른 이방직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에 있으며, 신도비명은 조선전기의 최고문장가인 서거정 선생이 지었다. 자녀는 1남 4녀를 두었다.

 

*忠烈 : 廉方公正曰忠, 有功安民曰烈

청렴하고 정직하며 공정한 것을 ‘충’이라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 공이 있는 것을 ‘렬’이라 한다.

*불천위 사당인 ‘충렬묘’에서 지금까지 기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한식절사와 가을시제(음.10.2)를 지낸다.

충열시호에 얽힌 이야기

봉상시에서 최초로 준비한 시호는 정질(貞質),정간(貞簡),정소(貞沼)였다.이에 성종이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고 평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청백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삶을 시호에 담아낼 것을 지적하여 봉상시에서는 일르 다시 논의하여 청렴하고,방벙하고,공평하고, 정직하다는 의미로 충,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공훈이 있다는 의미로 열을 택하여 충열을 시호로 추천 하였다.(구치관 연구소)

 

■ 10세 : 구 경(진사공, 충렬공의 독자)

충렬공의 독자로 태어나 일찍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18세에 돌아가시니 충렬공 가문의 불행이었다.

부인은 남원양씨로 내섬시 판관을 지낸 양연의 따님으로 집현전제학을 지낸 양수생의 증손녀이다.

*이때 남원양씨는 임신중으로 마침내 아들을 출산하였다.

묘소는 충렬공 묘역 오른쪽에 있다.

 

■ 11세 : 구장손(종친부전부, 진사공의 유복자)

충렬공의 적장손으로 어모장군충좌위부호군과 종친부전부를 역임했으며, 문집으로 ‘호보(號譜)’가 있다.

부안은 교하노씨로 영의정을 지내고 선성부원군에 오른 노사신 공의 따님이다. 묘소는 충렬공 묘역 아래(할머니는 왼쪽에 따로 안장)에 있으며, 묘지명은 모재 김안국 선생이 지었다.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 12세 : 구원지(성균관생원, 전부공의 독자)

전부공의 독자로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덕을 기르며 유덕한 군자들과 교유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인은 경주정씨로 좌리공신 이조판서 정효상의 따님으로 아들 셋을 두었다. 큰아들은 별좌공 휘 순이며 둘째아들은 직장공 휘 징이며 셋째아들은 지평공 휘 휘이다. 두 번째 부인은 창녕성씨로 홍문관부제학 성경온의 따님으로 영의정을 지낸 성준의 본생손녀이며 딸 셋을 두었다. 묘소는 충열공 묘역아래에 있다.

*충열공의 자손이 3대를 독자로 내려오다 여기서부터 별좌공계, 직장공계, 지평공계로 갈리게 되었다.

 

■ 13세 : 구 징(생원공의 둘째아들, 내자시 직장 증 좌승지)

생원공의 둘째아드님으로 태어나 품계는 종오품 봉직랑으로 내자시 직장을 지냈으며 부인은 남양홍씨로 생원 덕조의 따님으로 이조판서 홍여방의 후손녀이며 생원공의 큰아들 별좌공은 본종을 지키고 둘째이신 직장공께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입은 창녕성씨 부제학공 휘 경온의 외손 봉사를 지금껏 500여년을 우리 직장공 종중에서 이어오고 있으며 직장공께서는 자손들의 현달로 벼슬이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셨으며 부인은 숙부인으로 증직되셨다. 자손은 효연,충연,예연,문연4형제를 두셨는데 예연,문연은 자손이 없어 무했고,충연공 자손은 현재 종중에 참석을 하지 않고 있어 연락 할 길이 없습니다.

*묘소는 하남시 감일동 59-50번지에 합장으로 모셨다.

 

■ 14세 : 구효연(통정대부장단도호부사 증 이조참판 장단공)

직장공의 장남으로 1524년 중종 10년에 태어나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셔서 장단도호부사 이조참의를 하셨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셨고 부인은 고령신씨 판결사 신한의 따님으로 좌의정 신용개의 손녀딸이고 영의정 신숙주의 고손녀이고 묘소는 직장공 계하에 있다.슬하에 자식은 4형제:완(가산공),심(영월공) 하(무후),도(판관공)

도공 자손이 연락이 안되고 있습니다.

 

■ 15세 : 구 완(가산공 통훈대부 가산군수)

장단공의 장남으로 1542년에 태어나서 진사시에 합격하여 가산군수(지금 평안도 박천군의 일부)를 지내셨으며 증직 호조참의를 받으셨으며 부인은 창녕성씨 생원 언박의 따님이고 이조정랑 성중온의 증손녀이고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 도원수공 영하에 모셨다.슬하에 자손은 계원(통덕랑),득원 두분을 두셨다.

⇨실전된 도원수공 묘를 찾은 빈공께서 묘를 찾은 공으로 할아버지인 완(가산군수)의 묘를 도원수공 묘하에 모셨다고 함.

 

■ 15세 : 구 심(영월공 통훈대부 영월군수)

장단공의 셋째아들로 1554년 명종9년에 태어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통훈대부 행 영월군수겸 원주진관 동첨절제사를 지내셨으며, 부인은 증 좌승지 이필의 따님으로 좌의정 이행의 증손녀이며 아들 둘을 두셨는데 큰아들은 황간현령 장원이고 작은아들은 통덕랑 진원이며, 두 번째 부인은 고령신씨로 승지 신경락의 따님으로 한성서윤 신단의 손녀딸인데 막내아들 흥원은 오위도총부 사과이며 묘소는 애초에 천마산에 모셨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직장공 묘역 앞산에 모셔져 있다.

 

 

◈직장공 종중 내 소종중◈

 

▶가산공계(15세)

큰아들 계원공(16세):통덕랑

인(17세) 감역공 종중

빈(17세) 첨지중추부사 종중

둘째아들 득원공(16세)

훤(17세) 첨추공 종중

▶영월공계(15세)

큰아들 장원공(16세)

익(17세) 종중

핵(17세) 종중

둘째아들 진원공(16세)

흡(17세) 통덕랑 종중

삽(17세) 참판공 종중

힐(17세) 처사공 종중

셋째아들 흥원공(16세)

증(17세) 종중

상(17세) 종중

4. 능성구씨의 정체성(Identity)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개념정의를 논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담론이 요구될 것이다. 정체성이란 개인이나 집단별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체성을 공유한 집단의 사람들은 그것을 매개로 서로 이해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하나로 행동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힘이 존재하게 되므로 그 집단의 결속을 촉구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제기하는 정체성은 능성구씨라는 종족집단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능성구씨의 오랜 역사에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축적된 삶의 지혜와 경험을 통하여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문화와 전통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성구씨의 역사적 인물군을 탐색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능성구씨가 배출한 인물군◈

 

▶왕후 : 1인(원종대왕비 인헌왕후, 구사맹의 따님)

▶정승 : 3인(7세 구 홍, 9세 구치관, 15세 구인후)

▶공신 : 10인(좌리공신 9세 충렬공 구치관 등)

▶시호 : 17인(6세 문정공 구 위 등)

▶부원군 : 12인(4세 면성부원군 구 예 등)

▶ 군 : 21인(5세 면성군 구영검 등)

▶청백리 : 2인(9세 충렬공 구치관 등)

▶부마 : 5인(11세 능양위 구문경 등)

▶찬성 : 5인(13세 좌찬성 구사맹 등)

▶판서 : 17인(10세 형조판서 구 겸 등)

▶한성판윤 : 16인(9세 한성판윤 구치홍 등)

▶홍문관제학 : 7인(13세 백담 구봉령 등)

▶등단대장 : 10인(14세 충목공 구 굉 등)

▶문과급제 : 67인(2세 평장사공 구민첨 등)

▶무과급제 : 503인(12세 구 정 등)

 

능성구씨 최초의 족보인 을해보(1575년)에 등재된 인구가 3800여인이다. 조선 중기의 전체인구를 약 500만인으로 추산한다면, 능성구씨는 0.1%도 못되는 인구비중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인물군을 배출한 것은 상당한 벌열가문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할 것이다. 능성구씨가 배출한 인물군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즉 공신, 한성판윤, 등단대장, 무과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다는 것이다.

 

▶공신은 주로 정치,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에 기여한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훈작(勳爵)이고

 

▶한성판윤을 많이 배출했다는 것은 주로 경직(京職)에 등용되어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을 많이 해왔다는 뜻이며

 

▶등단대장에 많이 올랐다는 것은 무과급제자수와 무관하지 않지만 그보다도 집권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증거이다.

 

▶조선왕조 전체의 무과급제자는 정확한 통계가 없어 확인이 어렵다 하더라도 인구가 0.1%도 안되는 능성구씨로서는 조선 제일의 무반으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문과급제자의 경우에도 조선왕조 전체 문과급제자 약14,800명을 감안하면 능성구씨의 문과급제자수는 상당히 많은 것임.

 

여기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능성구씨는 공신, 한성판윤, 등단대장 등 요직의 인물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국가운영에 능동적으로 참여 하였으며, 문무과의 과거에 많은 수가 급제하였다는 것은 자아실현과 진취적 성향이 강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능성구씨처럼 소수의 집단에서 이와 같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려면 종족간의 결속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능성구씨의 정체성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진취적 성향

▶시대 변화에 능동적인 참여의식

▶효제(孝悌)를 실천하는 인화적 가풍

 

능성구씨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축적해온 이러한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 정체성의 가치는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능성구씨의 후예들은 조상님들이 물려준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인생의 지표로 삼는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능성구씨의 번영을 영속적으로 이어 나아갈 정식적 지주(支柱)가 될 것으로 믿는다.

5. 족보에 대한 소고(小考)

족보는 한 가문의 세대를 밝혀서 혈족으로서의 친소관계(親疏關係)를 분명이 하고, 그 구성원들의 약력(略歷)을 기록함으로써 가문의 역사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선원록(璿源錄)’을 작성하여 왕가의 가계를 기록하였으나, 성씨(姓氏)를 중심으로 하는 씨족(氏族)들이 족보를 간행하게 된 것은 조선왕조 초기에 시작되어 18세기 이후에 일반화 되었다. 일반 사가(私家)에서 족보를 최초로 만든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소씨족보(蘇氏族譜)’이다. 이 소씨족보를 만든 사람은 당송8대가의 한사람인 소순(蘇洵)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동파(蘇軾)의 아버지이다. 소순이 직접 쓴 족보서문에 이르기를, ‘一人之身 分而至於塗人 吾譜之所以作也’라 하여, ‘한 사람의 몸에서 분파하여 길거리의 남이 되기까지에 이르고 있으므로 내가 족보를 만들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말은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도 몇 세만 내려가도 곧 남이 된다는 뜻이니, 소순이 이를 우려하여 종족(宗族)의 친소관계를 밝혀서 씨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족보를 만들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우리나라 사가에서의 족보가행은 조선왕조 전기인 15세기에 시작되는데 성씨별로 최초의 족보를 편찬했거나 간행한 사례를 살펴보면,

 

◈15세기 족보편찬 및 간행사례◈

 

▶문화류씨영락보 : 1423년(세종5) 현존하지 않음

▶제주고씨족보 : 1450년(세종32) 현존하지 않음

▶남양홍씨갑술보 : 1454년(단종2) 현존하지 않음

▶안동권씨성화보 : 1475년(성종7) 현존하는 最古本 임*

▶전의이씨성화초보:1476년(성중7) 현존하지 않음

▶여흥민씨무술보 : 1478년(성종9) 현존하지 않음

▶창녕성씨계축보 : 1493년(성종24) 현존하지 않음

 

15세기에는 위에 열거한 7개 성씨가 족보를 편찬했거나 간행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안동권씨성화보’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성씨의 족보는 편찬을 했으나 간행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로 안동권씨성화보를 꼽는 것이다.

 

 

 

 

◈16세기 족보편찬 및 간행사례◈

 

▶한양조씨갑신보 : 1524년(중종19) 현존하는 족보 임*

▶합천이씨기축보 : 1529년(중종24) 현존하지 않음

▶파평윤씨기해보 : 1539년(중종34) 현존하지 않음

▶순흥안씨병오보 : 1546년(명종1) 현존하지 않음

▶영일정씨계축보 : 1553년(명종8) 현존하지 않음

▶문화류씨가정보 : 1562년(명종17) 현존하는 족보 임*

▶강릉김씨을축보 : 1565년(명종20) 현존하는 족보 임*

▶능성구씨을해보 : 1575년(선조8) 현존하는 족보 임*

16세기에 족보를 편찬했거나 간행한 성씨는 모두 8개 성씨인데 그 중에서 합천이씨, 파평윤씨, 순흥안씨, 영일정씨 등 4개 성씨는 현존하는 족보가 없는 것을 감안해보면, 간행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한양조씨, 문화류씨, 강릉김씨, 능성구씨 등 4개 성씨는 당시에 간행된 족보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고 하겠다.

 

이로써 보면 15세기에 시작된 족보의 간행은 16세기에 들어와서도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왕조 전기에는 주자가례(朱子家禮)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정착되지 못함으로써 각 성씨별로 종중(宗中)의 구성이나 활동이 미미했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족보를 편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시간이 수반되며, 특히 인쇄본으로 간행, 배포할 경우에는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여 그 재정적 부담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왕조 전기에 족보를 편찬했거나 간행한 성씨는 모두 14개 성씨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족보를 감안해 볼 때, 실제로 간행하여 배포한 족보로는 안동권씨성화보, 한양조씨갑신보, 문화류씨가정보, 강릉김씨을축보, 능성구씨을해보 등 5개 성씨뿐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 전기에는 각 성씨별로 종중의 구성이나 활동이 미미하여 종족으로서의 응집력이 미약하였고, 과다한 인적, 물적 부담에 따른 제약으로 인하여 족보의 편찬 및 간행이 활성화 되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다.

 

 

直長公 宗中 顧問 本祥 整理

2017年 07月 03日

行 列 定 規 (復數行列)

 

四

`

丙寅譜新定復數行列二十八字

︵

白二六世

|

至

五三世

︶一九八六年

 

出刊

 

※

 

癸卯譜制定行列十字中

 

五一世

宰

字를

 

鏞子로

 

五三世柱字를

 

集字로

 

名名

 

訂正하였음

。

炯

炳

四四世

三

`

癸

卯譜制定行列十字︵

白四四世

|

至

五三世

︶一九六三年

 

出刊

薫

熙

三四世

二

`

乙巳譜制定行列十字

︵

白三四世

|

至

四三世

︶

一九○五年

 

出刊

 

然

二四

世

一

`

癸丑譜制定行列十字

︵

白二四世

|

至

三三世

︶一八五三年

 

出刊

 

 

 

 

 

 

 

 

四五世

 

 

三五世

 

 

二

五

世

坤

重

培

奎

 

書

鉉

庚

四六世

銓

鍾

三六世

 

 

二六世

 

 

 

 

善

會

 

 

四七世

 

 

三七世

潤

滋

二

七世

漢

澤

汶

洙

 

 

榮

樂

四八世

秦

相

三八世

東

本

二八世

 

 

 

 

 

 

 

 

四九世

 

 

三九世

 

 

二九世

輝

煥

烈

燮

烋

謨

埈

起

五○世

康

均

四○世

在

敎

三○世

 

 

 

 

 

 

 

 

五一世

 

 

四一世

 

 

三一世

欽

鏞

鎰

鎭

鎬

祐

泰

承

五二世

浩

泳

四二世

源

齋

三二

世

 

 

 

 

 

 

 

 

五三世

 

 

四三世

 

 

三三世

杰

集

杓

根

彬

林